힐드가 톨비쉬를 (더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거 듣고 썼습니다 (좋아하는 노래~~~)
- 힐드, 당신은 나와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 뭐? 그건 진짜…… 못 견딜 것 같은데. 얼마나?
- 음, 지금보다 더 오래.
- 아무리 생각해도 일 년이 한계야…….
- 하하, 그렇겠죠. 나도 당신과 떨어져 있고 싶진 않습니다.
지난 엘베드 즈음이었던가, 톨비쉬가 지나가듯이 말한 이야기가 스쳐지나감... 그때 얘가 뭐라고 더 말했더라. 괜히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전례없이 낯간지러운 말을 직설적으로 콕콕 해대서, 얘가 왜 이러나 싶다가도 마냥 좋기는 했기 때문에 기대어 오던 몸을 조금 더 꼭 감싸서 안았던 때가.
전해야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멀린이랑 알터를 데려와 함께 목도한 지금 상황이 너무...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에 힐드는 잠깐 얼을 탈 정도였음
쾅, 콰앙, 쾅! 구름 위 어디에서 내려오는지 모를, 빛나는 닻이 수도 없이 내려와 쇠가 차륵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안 그래도 오랜 세월을 견뎌내느라 균열이 간 성소의 바닥에 마구잡이로 꽂힘
곁에 내려와 달라고 조를 때면 그러지 않을 때보다 못 이기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면서 지상에 발 디디던 때가 잦았던 것 같은데, 섬 자체를 없애버릴 것처럼 사납게 요동치는 신성력 틈에서 홀로 살아서 부유하는 톨비쉬의 모습은 여지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어서... 손을 뻗으면 다시 내려와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힐드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음.
- 너 여기 있으면 너까지 휘말려, 쟤가 하는 말 다 들었잖아!
멀린이 소리치며 허리를 붙잡고 알터가 팔을 감싸 당겼지만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톨비쉬, 하고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에는 꼭 전에 그랬던 것처럼 돌풍이 몰아쳐 세 사람을 성소 바깥으로 쫓아내고 말았음
성소 안팎을 가르는 구조물 너머까지 푸른 빛무리가 알 수 없는 문양을 그리면서 번져오는 모습을 본 멀린이 이변을 눈치챘는지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절벽에서 피신한 유니콘 대신 마법을 써서 아발론에 겨우 발을 디뎠음
뒤를 돌아보자 베그 절벽의 머리가 둥그런 구 형태의 배리어에 감싸여 잘려나간 모습이 보였음. 지상에 남은 돌무더기 일부가 무너져 바다에 떨어졌다가 곧 잠잠해지고, 성소 수원지에서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완전히 끊어져 멀리서 들려오던 폭포 소리도 잦아들고 나니 허공에 떠 있던 것이 이제 되었다는 듯이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으로 뒤덮여 자취를 감췄음
힐드는 그때에야...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
――――
수호와 파괴의 균형... 저울의 반대에 오를 자의 아주 오래된 부재.
상세한 개념을 모두 알기보다는 대체로 그 저울의 모양새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기보다는 똑바른 수평을 그리는 것이 옳다는 것 정도였지만 어느 정도 중심이 되는 흐름 정도는 이해하던 힐드였기 때문에 톨비쉬가 택한 이 무식한 방법―이쪽의 무게추 역시 세계에 개입할 수 없도록 멈추어버린다―을... 아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음. 다만 이러한 방식을 썼어야 했는가... 에 대해서는 내내 의문이었음. 시작과 끝을 안배해 두었다면 말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며 설령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는 뜻을 내걸었더라도 한 마디 말로써 나를 설득해줄 수는 없었던 건지... 절절한 이별의 말이 아니라도 늘 그랬던 것처럼 잘 자. 아침에 봐. 그런 인사 정도야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절벽 끝에 다리를 늘어트리고 앉아 시간을 보낼 때면 늘 다가와 푸르릉, 소리를 내는 유니콘의 갈기털을 쓰다듬은 힐드가 여전히 구름으로 가려진 자리를 올려다 봤음.
힐드가 아발론 근교를 찾는 일은 전처럼 잦지 않게 되었지만 누군가 또 하나 알던 이가 곁을 떠나고 난 날에는 항상 그 해변가를 찾곤 했음. 던컨이 소슬한 겨울 바람으로 돌아간 날이나 아쿨이 밀리아보다 더 오랜 잠에 들게 되었던 날, 에일리흐의 왕좌에 에레원을 쏙 빼닮은 딸이 오른 것을 축하한 뒤에, 어린 바투르가 가장 먼저 원정대를 나가고 이어 미르올이, 피르안이... 알터의 관 위에 첫 삽을 올려 뜨고 그 절벽 앞을 찾은 밤에 힐드는 그날 이래 이곳을 찾을 때마다 붉은 꽃도 잘 익은 사과도 없는 빈 손으로 매양 상복을 입은 채 다다랐다는 사실을 깨달았음
내가 별에서 왔으니 죽어 떠난 이들이 별이 되었다는 말은 이 땅에 있지 않을 테고, 만만한 것이 신의 이름이니 그 아이들은 모두 그 품에서 편안할 텐데. 떠나지도 못하고 그 부유섬에 갇혀 잠든 네게는 안식이랄 것도 바랄 수가 없나... 더는 눈물도 흐르지 않는 눈이 희뿌옇게 구름이 진 자리를 더듬었음
――――
두고 떠난 연인을 원망하는 시간이 짧았던 만큼 그리움은 정말로 길었지만... 그마저도 손으로 꼽을 수도 없는 시간 앞에서는 모두 무용했음
신의 뜻과 예언과 드래곤, 용사와 음유시인들의 이야기가 더는 새로이 태어나지 못하고 그저 구전되는 것만이 학교와 박물관, 각종 예술품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때가 되었을 즈음... 여기도 결국에는 그렇게 되나, 하면서 떠나온 고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을 둘러본 힐드가 눌러 쥐면 퍼석거리는 소리를 내는 플라스틱 컵과 컵홀더를 만지작거렸음
- 코치!! 왜 청승이야?
- 처, 청승이라니.
그나저나 너는 대표팀 애들도 아닌데 날 왜 코치라고 부르냐... 빨대를 푹푹 눌러 얼음밖에 안 남은 커피를 휘휘 저은 힐드가 늦은 친구를 타박하는 대신 실없는 소리나 좀 내걸음... 영웅 밀레시안도 아니고 에린의 수호자도 아니고 너 옛날에 하던 일을 다시 잡았대니까 신기해서 그러지, 실쭉 웃은 멀린을 보며 괜히 헛기침한 힐드가 그래서 오늘은 왜 불렀느냔 말을 꺼냈음. 밥 잘 먹고 다니냐는 이야기도 아니고 얼굴 보자마자 용건이냐며 입술을 좀 삐죽거리는 모습에는 웃고 말았지만.
- 그, 거기 있잖아.
- 거기?
- 그 왜…… 네가 싹~ 사들인 땅 있잖아.
과거를 모두 아는 친우를 만난다는 사실이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는 건지, 아니면 옛 기억이란 내내 끔찍한데 나니까 또 겨우 만나는 주는 건지. 의도적으로 과거의 행적과는 부러 거리를 두며 밀레시안도 아닌 다난인 체 살고 있는 친구를 빤히 보던 멀린이 허아아아, 하고 한숨을 푹 쉬었음. 몸 뉠 집이 아닌 땅을 사고 팔고 슬슬 투기라는 말까지 보편적일 만큼 발랑 까져 현대에 가까워진 에린의 풍토를 생각하며 힐드가 빨대를 입에 문 채로 말을 우물거렸음. 나 땅 산 적 없는데? 있는 골드 쪼끔 헐어서 센터 근처에 집만 한 채…….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양새에 멀린이 제 머리만 북북 긁다가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내쐈음
- 아발론 있잖아.
- ……아.
- 그건 아직 '네 땅'이잖아.
어느 순간부터 신의 힘을 운용하는 일이 어려워지다 곧 드물어지기 시작하고, 오랜 옛날부터 조직되어 신의 뜻을 받들었던 조직마저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던 날에 그 땅을 보살펴 달라는 청을 받아주었던 기억이 났다. 틈틈이 가서 멋대로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쫓아내고, 학술적으로 중요한 땅이라며 좀 살펴도 보고 조사도 하게 해 달라는 사람들 앞에 사유지 출입금지 팻말이나 좀 다시 걸고 그러긴 하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명의 갱신을 해야 하니 곤란하기는 해서 이제는 또 누구 핑계를 대며 상속 절차를 밟나 고민하던 차였음. 밀레시안이라고 하면 알아서 연장해 주지만 거길 쥐고 있는 밀레시안이라면 '그' 밀레시안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고... 얼음을 깍깍 깨물면서 힐드가 눈을 굴렸음
- 벌써 명의 갱신할 때가 됐어? 신경도 안 쓰고 있느라.
- 그게 아니고…… 그, 으음.
- ……학부생 연구 때문에?
- 아니, 아까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는데.
밤에 들어가서 샘플 채취만 좀 하는 거면 상관 없어, 네 학생이면... 하고... 말을 잇는 힐드의 눈앞에 멀린이 휴대폰을 쓱 디밀었음. 오랜 세월 풍화되어 침식된 절벽, 그 위로 언뜻 보이는 건... 확실해지면 말할까 하다가, 하는 멀린의 목소리가 채 이어지기도 전에 힐드가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나섰음.
――――
아니나다를까 대낮부터 아주 엉망인 꼬라지... 스카하 해변에서 수원지로 들어가는 문게이트 근처에는 각종 학술 단체부터 그저 맹목적으로 주신의 뜻을 받들자며 소리치는 신생 종교단체까지, 사유지이니 멋대로 출입하면 처벌한다는 딱 그 팻말 코앞까지 몰려들어 아웅대는 것들을 질린다는 듯이 쳐다본 힐드가 삼삼오오 모여앉은 작자들을 헤치고 팻말을 넘어섰음. 어! 어, 뭐예요! 거기 들어가시면 안 돼요!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주제에 누가 먼저랄 것은 상호간에 견제하는 중이었는지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치는 소리에 힐드가 혀를 차며 스태프를 꼬나쥐고 팻말 위로 벼락을 꽂았음. 시커멓게 타죽어버린 풀밭, 근처로 불똥이 튀어 소리를 지르며 밟아 끄는 사람 몇. 신고, 처벌, 공권력, 그딴 것보다야.
- 따라 들어오면, 당신을 자식까지 쫓아가서 천벌 내릴 줄 알아.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안쪽에 순간이동 좌표라도 지정해 놓을걸. 벙찐 사람들이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고 당신 설마, 하는 말을 내걸기도 전에 힐드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음
몇백 년 전까지만도 간간이 드나들며 나무로 된 복도가 삐걱거리는 걸 정돈하기도 했던 기사단 관사는 담쟁이를 비롯한 식물들에 파묻혀 알아볼 수도 없게 된 꼴이었음. 낡아 쓰러진 원탁, 부러 닫아둔 게이트의 거대한 문이 환한 햇볕 아래 오래도록 방치된 구조물의 민낯을 내보이며 버티고 있었음. 한밤에 끊긴 발자취가 해가 떠오른 날이라고 다시 이어질 리는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고... 당장에라도 땅을 박차고 나갈 방법은 여럿임에도 정작 게이트까지 들어온 지금에 와서 힐드가 걸음을 멈췄음. 부리나케 달려와 숨기고 있던 정체를 제 손으로 까발릴 만큼,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토록 그리던 그 땅의 모습이 분명했지만...
- …….
한층 무성해진 세계수, 이제는 흔적조차 다한 주거지와 야영지를 느린 걸음으로 헤쳐 온 힐드가 곁에 다가서는 유니콘의 갈기를 쓰다듬고 등을 툭툭 쳐 멀리 보냈음. 멀리서 소금기 섞인 바람이 불어오면 자연히 고개가 들렸는데, 변이된 모습도 없이 이제는 여느 해변과 다를 바가 없어진 해변가 위로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난 부유섬이 보였음... 멀린이 보여 준 사진과는 달리 푸르른 빛줄기도 이제는 가신 모양을 보니 안에 잠들어 있을 이가 오랜 잠에서 눈을 뜬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음.
다시 보면 분명히 울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만나면 왜 그랬느냐고, 꼭 그날처럼 내 가슴에 뭐라도 박아넣는 게 네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느냐고, 기어이 미운 말을 내뱉어서 그 애 눈동자가 어둑하게 꺼져서 바닥으로 늘어지는 것까지 봐야만 하겠다고 다짐 아닌 다짐도 했었는데. 그러다 또 어느 한 날은, 다시 한 번만 더 마주할 수만 있다면 더한 소원이 없겠다고도. 여지껏 너와 함께 지낸 날보다 네가 없이 지난 날이 더 많으니 앞으로는 그 책임을 네가 혼자 다 지라는 말도, 균형도 수호도 무거운 말도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 앞으로는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도...
그러니까, 보고 싶었다는 말을...
절벽이 아니라 이제는 부유섬이 된 땅 위로 톨비쉬의 손길을 받던 유니콘이 다시금 땅을 박차고 오르는 모습이 보였음. 그 너머로 이제는 가물한 남자의 인영이 어른어른, 햇살이 버거운 와중에 힐드가 눈을 가늘게 떴음. 태양빛을 닮았다는 보석에 비견하던 황금색 고수머리, 한쪽 끄트머리에 흉이 남은 건 문제될 것도 없다는 듯 산이 선명한 눈썹, 지금 수평선 위와 아래에 걸린 바다와 하늘보다 더 찬란한 눈동자... 시선 닿을 때마다 가슴에 묻었던 것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힐드가 딱 열 남짓한 걸음을 남겨 두고 걸음을 멈췄음.
- 힐드.
무슨 뜻일까. 힐드는 엷은 호선을 띤 입술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것이 재촉인지 아니면, 그러니 괜찮다는 것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어떤 것도 읽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음. 아, 혹시 지금은 밤이 되지 않아서. 이 땅을 찾아와 밟은 때가 아직 햇볕이 선명한 때라서인가. 몸을 띄우지도 날개를 펄럭이지도 않은 채로 저를 향해 다가오는 톨비쉬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던 힐드가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었음. 걸음을 뗄 때마다 바닥에 늘어지는 옷자락이 무성하게 자란 풀밭 위를 스치고, 하얀 맨발이 드문드문 드러나 걸음 디디는 모습을 보고서 힐드는 제 발을 내어주는 대신에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났음.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 미안합니다, 많이……
- 멀린이.
다가서는 팔뚝을 양손으로 붙잡고, 힐드는 그 칼... 그 거대한 검이 다시 몸을 꿰뚫는 상상을 했음. 차라리 그때에는 너를,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잘 알았던 것 같지 않나.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톨비쉬가 더 다가오는 것을 막아선 힐드가 톨비쉬와 눈을 마주했음... 의문이 여실한 눈동자가 조금 일렁거렸다가, 이내 겸허하게도 수그러드는 모습을 보면서 입매를 당겨 올린 힐드가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겨우 띄엄띄엄 내걸었음
- 멀린이, 기다렸을 거야.
- …….
- 가자.
어떤 깨달음이라는 건 원하지 않은 때에도 불현듯 선명하지 않던가...
심장이 뛰는 소리도 맞닿는 체온도 시선 맞추는 그 시간까지 잊은 적 한 번이 없는데도 힐드는 지금, 이 순간에야 이 땅에 다시 다다른 것이 내가 이제는 너를 가슴 속에 묻어야 하겠다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음. 호선 그린 입술이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한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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