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썰을 같이 풀어주신 소중한 에메 밀묵에게 감사
그리고 밀묵이 추천해준 노래를 깔고 들어가다
때는 말썽쟁이 안젤라가 사고 현장에서 입은 부상이 다 나았을 즈음... 애를 구한 건 좋았지만 차에 치이고서 다섯 바퀴 반을 구른 몸뚱이가 여기저기 쑤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음... 그래도 유소년 국대 유망주도 구해낸 데다, 세상 하직할 뻔한 건 면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힐드는 캐비닛에서 더플백을 꺼내 메고 털레털레 트레이닝 센터를 나섰음. 해거름쯤 된 것도 아니고 저녁보단 밤에 가까운 시각이라 아무도 없을 게 뻔한 로비에 교복 입은 꼬맹이 하나가 다리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휴대폰을 쥐고 있는 모습이 보였음... 어리광쟁이 막내동생이 학원에서 또 샌 게 뻔해서, 끌끌끌 혀를 차고서 가까이 가서 머리를 북북 쓰다듬음
- 에첼, 가자. 너 또 학원 빼먹었어?
- 형! 아, 아니야. 갔다 왔는데. 오늘 칭찬도 들었고.
- 아, 하. 칭찬 들었다고 자랑하려고?
- 히.
으이구. 볼을 쭉쭉 잡아 늘린 힐드가 그러면 데려다 주는 길에 본가에서 저녁이나 좀 얻어먹고 갈까, 생각하면서 동생을 데리고 로비를 나섰음... 선수 생활을 할 때는 굳이굳이 안으로 들어와서 형 훈련하는 것도 방해하고 구경하고 나도 물에 들어가고 싶다고 그러더니, 코치로 전직하고 난 뒤로는 형 심정을 안 건지 교복을 입어서 철이 든 건지 얌전하게 구는 모양새가 어쩐지 싱숭생숭함. 그래도 차 어디 있는지 맞춰 보겠다면서 줄래줄래 뛰어가는 건 말 안 듣는 막내 모습 그대로였지만.
- 뛰면 넘어진다~
- 맨날 그 소리!
- 에첼, 앞에!
차 들어오는데 진짜! 힐드는 날래게 달려서 동생을 허리부터 낚아채서 번쩍 들어올림... 그리고 차는 한 블럭 앞쪽에, 것도 다른 방향쪽 차단기를 얌전히 기다리다가 스르르 빠져나감... 형 저번에도 이러다가 그랬지. 가나지같이 굴면서도 한번씩 콕 찌르는 말을 하는 에첼 땜시 괜히 힐드는 엄살을 부렸음...
- 아, 아야야. 어깨 빠진다. 에첼 너 진짜 무겁다.
- 아 왜애.
빨리 이대로 들고 가서 내다 버려야지 농담하던 순간에... 갑자기 누군가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애를 안고 있는 팔뚝을 덥석 잡았음... 걷는 소리는커녕 다가오는 줄도 몰랐는데, 난데없이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남자는 요지부동으로 잡은 팔을 놔 줄 생각도 않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음
이거 뭐지? 애 노리나? 보호자가 뻔한데? 하필 가로등도 너머에 있는 터라 얼추 알아볼 수 있는 건 이 남자가 (저보다는 아니지만) 꽤 키가 크고, 체격이 잘 빠졌고, 고실거리는 금발을 갖고 있단 거였음
몇 발짝 떨어져서 말을 건 것도 아니고 난데없이, 번듯하게 생겨먹은 남자가 말도 없이 퍼스널 스페이스부터 침범한 게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이 어둠에 좀 익었을 즈음 힐드는 모난 소리를 냈음
- 뭡니까? 갑자기.
- …….
반듯하게 쓴 안경 너머로 당혹스러운 듯한 눈이 몇 차례 깜빡거리는 모양에 이 손을 털어낼지 말지 고민하던 와중에 에첼이 물었음. 형, 약속 있었어? 애 앞에서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에첼 머리만 쓱쓱 쓰다듬고서 차키를 쥐여줌. 저쪽 블럭에 대 놨으니까 차에 가서 기다리라고. 말 잘 듣는 동생이 낯선 사람한테도 꾸벅, 인사를 하고 몇 번 뒤를 돌아보더니 멀어지는 모습을 쳐다보던 힐드는 이번에야말로 뭐 하는 사람이냐고 따지려 고개를 돌렸음.
- 돌아, 돌아갑시다…….
퍽 절박한 기색에... 내려다보던 눈만 의아하게 깜빡거린 힐드는 사위가 어두운 와중에도 이 남자가 눈꼬리에 뭘 매달고 있는지는 모를 수가 없겠다고 생각함. 일그러진 표정이나 여전히 힘이 들어간 손...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내려다 본 얼굴에 번듯하게 생긴 남자, 일 뿐이라는 생각을 슬쩍 철회한 힐드가... 이런 사람을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생각하면서 좀 누그러진 투로 물었음
- 혹시 나 알아요?
- 내가, 당신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 음.
- 힐드. 당신이 있을 곳은…….
애칭도 알고. 뭐, 이름은 많이 팔리긴 했는데. 그런 생각이나 가볍게 하면서... 어째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란 말을 하려다 뚝 잘라버린 듯한 남자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가만 쳐다봄. 이걸 쳐내면 아마 울겠지. 그런 생각에 안 붙잡힌 쪽 팔을 들어서 눈썹이나 슥슥 긁적거렸음.
- 글쎄요, 나 있을 곳이야 수영장 아님 집이지.
- …….
- 뭐 다른 데가 또 있나. 어디 가잔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딴 데서, 날 봤어요?
남자는 에첼이 멀어진 자리를 한 번 돌아보더니 붙잡았던 팔을 놓고 천천히 미끄러지듯이 양손을 내려서 힐드의 한쪽 손을 붙잡았음
- 날 용서하지 마세요. 어떤 말이든, 듣겠습니다.
- …….
- 그러니 나를…… 선택해 주세요.
고작 가을을 목전에 둔 날씨치곤 이상하게도 맞잡은 손이 너무너무 차가운데다... 붙잡은 손에 닿을 만큼 몸을 수그린 모습하며 울 것 같이 찡그러졌던 눈가나... 또 지금, 무슨 힘을 그렇게 주는지 손이 바짝 짓눌려 있는데도 이걸 벌벌 떨고 있다는 것하난 모를 수가 없어서 수상쩍은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 보기만 함... 뭐, 강제로 데려간단 것도 아닌데 한 번쯤은? 생각했다가도 단순히 어디 좀 같이 가자는 게 아니라 '돌아가자' 고 말한 거니까... 어째 석연찮아서 흠, 하고 가만히 숨만 내쉼
그러고서도 얼마간, 한숨만 푹 내쉰 힐드가 남자의 손을 남은 손까지 뻗어서 천천히 맞잡아 줌
- 당장 결론 내려야 하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면, 이야기 좀 하죠. 뭐 어디로 가는 건지,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건지 그런 얘기는 해 줘야지 내가 알겠다고 하지.
- …….
- 고개 좀 들어 봐요.
- ……미, 미안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톨비쉬는 힐드가 이야기를 하자고 말해줄 줄 몰랐음... 아닌 게 아니라 이이는 사람이 좋고 친구도 좋지만 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알터를 볼 때만도 항상... 도리를 아는 자라면 아벨린이나 피네 때의 일과 같이... 뻔히, 힘들 걸 알면서 여기 있는 모든 걸 다 버리고 자길 택해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톨비쉬는 한순간이지만 이대로 힐드를 데리고 가겠다고 생각한 자기자신이 부끄러웠음... 고개를 들고서도 약간 처진 시선에 여전히 빨간 눈을 깜빡거리는 남자를 가만히 보던 힐드가 어둑한 찰나에 혹시 우는 건 아닌가 싶어서 한쪽 손을 들어다가 안경 아래쪽 눈가를 살짝 훔쳐봄 (퍼스널 스페이스: 본인이 먼저 지키지 않음)
- 다행이다. 우는 건 아니네. (손 치우고) 그럼 가죠. 애가 있어서 집에 먼저 들러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이렇게 훅 다가오는 면모가 여전해서 톨비쉬는 더 울고 싶어졌음... 입술 안쪽의 여린 살만 꾹 깨물면서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 톨비쉬는 제 행동이 아이를 얼마나 불안하게 했을지, 형을 갑자기 사라지게 만들고 나면 또 얼마나, 하고 뒤늦게 드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음
힐드는 힐드대로 어째 말이라도 나누쟸더니 더 시무룩하게 수그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대체 무슨 일이람... 생각했을 거고... 그런 와중에 톨비쉬는 손 놓는 걸 잊어서... 여전히 꼭 잡힌 손만 한번 내려다 보고서는 굳이 쳐내진 않고서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감. 저쪽에 차 대놨어요. 하고 손 살짝 이끌어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길을... 손을 맞잡은 채로 걸으면서 이 얼마 없는 거리를 실감할 때마다 달라진 건 이 사람이 무엇이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음... 에린의 영웅이자 주신의 새로운 검... 추앙받는 무언가가 아닌 한 개인인 힐드
톨비쉬는 차라리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운 처지였다면 그 삶을 존중하면서 이쪽에 정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허황된 생각이나마 하고 말았음... 주신의 손으로 빚어져 짊어진 사명을 이루어야 할 자신의 운명이 원망스럽다는 감정은 다시 성소에 오른 그날 이래 참 오래간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단들 톨비쉬는 그 모든 것들을 등질 수 있을 리는 없었기 때문에... 정작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하는 주제에... 나는 무슨 자격으로 이 사람의 일생을 포기해 달라고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멍하니 했음
- 형! 아까 그……
힐드 마차를 몇 번 얻어타 본 짬으로 차 문은 어렵지 않게 연 톨비쉬가 차에 오르는 걸 본 에첼이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입을 꾹 다물었음... 낯 가리는 어린이를 본 톨비쉬는 조금 웃으면서 목례했고, 에첼도 어색하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들었음
이후 오가는 대화 없이 차 안에는 조금 정적...
- 안전벨트는 왜 안 해요?
- 안전벨트요?
그래야 출발하지. 조금 황당하다는 듯 보던 힐드는 몸을 숙여서 조수석 쪽 안전벨트를 쭉 당겨다가 찰칵, 채워주고 다시 바로 앉음... 멋쩍은 듯 헛기침하고서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남자를 본 힐드는 말씨도 어째 고상하고, 차를 잘 안 타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 밖으로는 내지 않고서 차를 출발시킴.
신호를 받아서 멈춘 와중에 백 미러로 동생을 넘겨다 본 힐드는 늘 그랬듯이 애한테 잔소리를 함... 에첼, 어두울 때 차에서 휴대폰 하지 말랬지. 헤헤, 응. 휴대폰을 쏙 집어넣는 에첼을 보면서... 톨비쉬는 생각했음. 저 애가 에첼이구나. 알터를 많이 닮았다던, 그리고 자길 정말 잘 따랐다던 힐드의 막내 동생이.
- 들어가. 저녁 챙기고.
- 온 김에 밥 먹고 안 가고?
- 늦었는데 뭘. 어차피 내일 주말이니까 내일 봐. 낮에 바로 올게.
아빠한테 맛있는 거 해 놓으라고 해. 농담 삼은 말에 킥킥 웃는 동생을 보면서 손을 살살 흔들어 준 힐드가 창문을 올리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음. 내일... 내일 봐. 힐드가 그렇게 인사하는 걸 들으면서 톨비쉬는 도저히 표정을 정돈할 수가 없어서 허벅지 위에 오른 손으로 주먹만 세게 눌러쥐었음. 원망 받을 다짐만 한번 더 하면서....
차가 다시 대로로 나온 뒤에야 힐드가 슬쩍 고개를 돌려서 흘긋거림. 어째 낯빛이 펼 생각을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좀 하면서는 이런 분위기에 농담할 건덕지는 생각 안 나는데... 생각하면서 눈썹을 긁었음
- 이름이 어떻게 돼요?
- ……톨비쉬라고 합니다.
- 톨비쉬…… 톨비쉬. 음. 미안합니다, 난 기억이 안 나는데. 어디서 만난 적 있었던가요?
짧은 대화를 나누는 내내 벌써 세 번째 신호에 걸린 차를 가만 멈춰세우면서 핸들 위에 얹힌 검지를 톡톡 두드림
- 우린 다른 도시에서 만났습니다. 이곳과는 풍경도, 생활 방식도 달랐지요. 당신이 갑자기 사라져 찾으러 온 겁니다.
- 그래요? 음. 옛날에는 여기저기 다니긴 했는데. 그런 게 다르면 아시아 쪽인가?
- …….
- 음, 미국?
다행스럽게도 단번의 기회에 같은 대륙 같은 나라에 떨어진 거라면 좋았겠지만... 톨비쉬가 여태 힐드를 찾으려 몇 년에 가까운 동안... 에린을 살피는 틈틈이 이 세계에 눌러찍은 좌표에 위치했던 나라들과 같은 후보군에 톨비쉬는 아무런 말이 없었음
- 에린이라는 곳입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 에린……? 그런 지명은 처음인데요.
도시 근교에 있는 카페에 들러서 차를 대면서 힐드는 가본 적도 없는 곳이라고 중얼거렸음
- 가 보면 생각이 날 거란 말은 할 수가 없겠군요. 이렇게 감을 못 잡고 계시니 말입니다.
- 하하. 글쎄, 들으면 또 기억날지 모르죠. 일단 내립시다.
차는 법도 몰랐으니 푸는 법도 모르겠지? 힐드는 벨트를 풀어주려고 고개를 돌리고서야 농담 같은 말을 하던 톨비쉬의 표정이 또 안 좋은 걸 봤음
- 울라고 한 소린 아닌데.
- 울기는요. 겨우 농담에 울 만큼 눈물이 많지는 않습니다.
아까는 그렇게 비죽비죽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별로 다르지도 않은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감을 못 잡는다는 말도 어쩐지 농담 같이 들리지는 않아서... 마음이 좀 안 좋았지만 톨비쉬가 문을 열고 먼저 내리는 모습에 힐드도 뒤따라 내림
같이 카페에 들어가서는 마감 시간 안내부터 받아버린 두 사람... 한 시간 반 남짓 남았다는 안내답게 너르기만 한 이 층짜리 카페에는 앉아있는 사람도 얼마 없었음... 힐드는 금방 먹고 나갈게요~ 하고 농담했지만
- 뭐 마실래요? 여긴 거의 다 맛있긴 한데.
- 음…….
- 아, 그리고. 저 저녁이 아직이라 샌드위치 시킬 건데. (그쪽도? 하고 봄)
- 이 시간까지 저녁은 어쩌다 거른…… 아, 나는 커피면 됩니다.
- 그, 그게. 애들 오후 훈련이 좀 길어져서 그거 봐준다고…….
뭔 잔소리가 이렇게 자연스럽지? 거기다 난 왜 또 이걸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주절주절... 어째 뒷덜미를 슥 잡혀서 끌어올려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힐드는 뒷머리만 조금 긁적거림...
아무튼 알겠다는 말이랑 같이 힐드는 커피랑 에이드랑 샌드위치랑 빵이랑... 그리고 메뉴판을 빤히 보고 있었음 (아이고)
- 나 때문에 식사 시간이 더 늦어진 건 아닌지 걱정이군요.
- 아뇨, 괜찮습니다. 집에 가서 먹나 여기서 먹나. 음, 아. 샐러드도 한 팩 주세요.
진동벨 받아서 같이 계단 올라가면서... 그 먼 옛적 사막에서도 아발론에서도 그리고 지금에까지 한 번도 존대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이런 느낌이구나, 생각한 톨비쉬는 방금까지 힐드가 보인 모습이 허술하기 짝이 없던 예의 그것인지 아니면 몸에 배어 익숙해진 것인지 가만히 생각하면서 한적한 자리를 먼저 잡은 힐드와 마주보고 앉았음. 뭐라고 말을 붙이나... 고민하다 줄줄이 나열됐던 메뉴 이야기를 꺼내봄
- 음, 평소에도 이렇게 다양하게 시켜 드십니까?
- 앗. (얼굴 벌개짐...)
- (빤...)
- 그~ 으음, 경기 뛸 때 먹던 양이 안 줄어서요. 적게 먹으면 힘이 안 나서 그냥 그대로 먹고 움직여요. 조, 좀 많긴 하죠.
- (고개 젓고) 아뇨, 잘 드시니 보기 좋습니다.
- ……크, 크흠! 그, 거기 얘기나 좀 더 해보세요.
힐드는 급하게 말을 돌림 ㅋㅋ ㅠㅠ 잘 듣겠다는 듯이 조금 가깝게 앉은 힐드를... 반듯하게 앉아서 쳐다보던 톨비쉬가 입을 열면서, 괜히 제 약지에 걸린 반지를 쳐다봄
- 음…… 어디서부터 말하는 게 좋을까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란 말은 상투적인 것 같은데.
- 그래요?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덴 드물지. 여긴 공기도 안 좋고 물도 안 좋거든요. 또?
- 하하. 이제 조금 괜찮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어야 할 텐데요. 또…… 왕이 다루는 군주제가 아직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 오……. 네덜란드인가?
- 으음, 아닙니다. 에일리흐 왕국은 다른 곳에 있거든요.
마법이나 마족, 신과 같은 이야기는 이 세계에 있어 허무맹랑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을 테니 조금 이따 말하기로 가만 미루어 둠. 또 무슨 이야기를 하나 말을 고르는 사이, 진동벨이 크게도 울려서 톨비쉬가 어깨를 움찔거렸음
- 아, 하하. 받아올게요.
- ……큼, 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어딘진 모르겠지만 거긴 이런 게 없나 보다. 가볍게 생각하면서 힐드는 마실 걸 받아오는 사이 가만 생각해 봤음 물도 좋고 공기도 좋은 에일리흐 왕국. 뭐 어디 소설 속에 나오는 이름 같이 생겼다... 생각하면서 리히텐슈타인이랑 비슷한 데인가? 그냥 내가 공부를 잘 안 해서 모르는 걸지도? 하고 일축해서 생각함 (허술)
트레이를 쥐고 털레털레 계단을 올라온 힐드는 창가를 내다보면서 가만히 앉아있는 톨비쉬에게 가까이 다가갔음. 트레이를 내려놓다 말고 별안간...
- 혹시 원래 안경을 썼어요?
눈을 조금 크게 뜬 톨비쉬가 반쯤 내려진 트레이를 받아서 테이블에 놓으면서 대답함
- 아뇨, 원래 안경이 필요한 시력은 아닙니다.
- 실례 좀.
그러더니 슬쩍 허리를 숙여서 안경 다리를 쥐고 벗겨 봄
렌즈 너머로 보던 거랑 별 차이는 없는 새파란 눈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아, 미안해요. 하는 말이랑 같이 다시 조심조심 씌워주고는 마저 자리에 앉음
- 아니, 안경으로 가리는 게 아깝지 않나 해서. 안 어울린단 뜻은 아닌데, 뭔가……
- ……
- 익숙하지가 않네…….
힐드가 허리를 숙여서 자길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꽤 오래간만이라... 눈만 깜빡이고 있던 톨비쉬는 조금 웃으면서 안경을 벗어다 옆에 내려뒀음. 그게 안 어울린단 뜻 아닌가요? 하고 웃으면서
웃는 얼굴... 안경을 내려다보느라 살짝 내리깔렸던 눈 위로 속눈썹이 팔랑거리다가 다시 반듯하게 뜨여서 자길 마주보는 모습... 그런 걸 가만히 보던 힐드가 다시 입을 열었음
- ……질문을 바꾸죠. 나랑 잘 알던 사이였어요?
- 잘 알던 사이였지요. 당신이 내게 좋아하는 곡이라면서 노래를 불러주던 기억이 나는군요.
- 노, 노래를요. 난 노래 잘 못 하는데…….
- 노래만 해 주었겠습니까, 연주도 해 주었지요. 아, 악기라도 가져왔으면 연습한 성과를 보여드렸을 텐데.
발 디디지 않게 된 때보다 조금 더 가벼워진 말씨를 빚어낸 톨비쉬가 먹으라는 듯 음식을 가만 손짓함. 혹시 몰라서 두 개를 챙겨온 포크를 하나는 톨비쉬 앞에, 하나는 자기가 든 힐드가 샐러드부터 쿡 찍었음
- 음, 흠. 기타는 칠 줄 알긴 하는데... 그래도 부끄럽네요. 잘하는 건 체육이지 음악이나 미술이 아니라서요. 하하, 들을 만하던가요?
- 예, 그래서 나도 그 곡을 좋아하게 됐거든요.
무슨 사이였다고 말 안 하는 것치곤 너무 한 가지 관계만 떠오르지 않나. 샐러드를 우물거리던 것도 관두고 힐드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톨비쉬의 왼손만 곁눈질함. 멀쩡하게 생긴 반지... 크흠, 헛기침만 괜히 좀 하고서 무슨 노래였는데요? 하고 물었음
가수 이름이나 노래 제목이 나왔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톨비쉬는 가만가만 방랑하던 시절, 새벽녘 여명이 밝아오는 사막에서 이름 모를 여행자가 류트를 들고 불러줬던 노래를 허밍했음
두 번 듣지 못해서 오롯이 원곡과 같지는 못한 그 투박한 음을...
- 내가…… 그 노래를요.
- 날 보더니 이 노래를 들려줘야겠다고 하더군요. 당신 눈에 내가 제법 힘들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옛 생각에 조금은 차분해진 표정이 된 톨비쉬가 괜히 얼음이 녹아가는 컵에 빨대를 한 바퀴 돌려 저었음...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시선만 피할 곳으로 그걸 찾은 것처럼
톨비쉬가 눈을 내리깐 모습을 가만히 보던 힐드는 슬슬 아려오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짚었음... 머리는 안 부딪혔는데 왜 아픈지.
- 나도 엄청 힘들 때 오래 들었던 노래긴 해요. 그거라도 없었으면 버섯 필 때까지 방에 있었을 걸.
-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땐 그런 걸 물어볼 만큼 붙임성이 없었어도요.
- 그래요? 지금 이러는 걸 보면 붙임성은 많아 보이는데.
- 그런가요.
- 뭐, 그땐 날이 추웠으니까. 입이 얼었을지도요.
웃을 법도 한 대화인데 둘 중 누구도 웃음기를 머금은 사람이 없었음
그때를 기억하지는 못 하는 것 같았는데, 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하는 모습이 그때를 기억한 건지 무심결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톨비쉬는 속입술만 꾹 물었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음
-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주변에 따뜻한 거라곤 겨우 모닥불 하나지 않았습니까.
- 그랬나. 캠핑이라도 하고 있었나…….
- …….
- ……파란 옷이었고.
- 예, 그랬었지요.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힐드의 눈을 마주보면서 고개를 끄덕인 톨비쉬는 괜히 현대의 것을 모방한 코트의 깃을 만지작거림
- 오늘도 파란 옷을 입고 올 걸 그랬군요. 한 벌쯤은 있었을 텐데.
- 원래는 빨간 옷도 좋아하잖아요. 아니지, 흰색…… 흰색이랬던 것 같다. 거기서 봤을 때…….
떠오르는 게 있을 때마다 반동이라도 있는 건지 머리가 더 욱신거려서, 저 남자의 반듯한 얼굴 아래에 뭘 꿰어 입었던 걸 봤는지 좀 제대로 헤집고자 힐드는 눈을 질끈 감았음. 음... 하고 가만히 목을 울리다가, 무릎 위에 양손을 걸친 채로 뭔가 말했음
- 이제 멀쩡한 옷 안 입지 않아요?
- ……지금껏 내가 멀쩡한 옷을 안 입고 있는 거라 생각했던 겁니까?
- 아니, 그게…….
기억도 온전하지 못한 연인에게 따져 묻고 만 톨비쉬... 질책인지 수줍음인지, 아 이거 어쩐지 후자 같고. 급하게 아니, 하고 변명하면서도 어깨를 들썩이면서 좀 웃은 힐드가 다시 머리를 짚었음
- 솔직히 에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걸…….
에첼이 아니라. 에첼이 아니었는데. 긴가민가한 채로 중얼거리던 힐드가 아예 손바닥으로 머리를 툭툭 두드렸음. 생각해 내! 라는 듯이... 그러더니 말함. 에첼 말고 강아지…… 하고...(ㅋ) 톨비쉬는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는 듯한 모습이 기뻤다가도... 한숨을 푹 쉬었음
- 힐드, 귀여워한 그 아이의 이름은 알텁니다. 오해할까 싶어 말하는 거지만 엄연한 사람이고요.
- 아! 어, 맞아. 알터. 이거 알터한텐 비밀로 해요…….
- 저번에도 알터에게 비밀로 하자고 했었습니다.
- 그건 잘 기억 안 나. 아무튼, 음. 아까 봤죠. 정말 비슷하지 않아요? 걔도 되게 강아지같이 굴어요. 착하고, 가끔 엄청 용감하고.
- …….
- 거기 있을 때 알터만 보면 걔 생각이 나서. 음, 거기…… 에린에서 정확히 어딘진 아직 가물가물한데.
힐드가 눈을 감고 기억을 반추하는 사이... 알터를 보면서 동생을 떠올렸다는 말에 톨비쉬는 제 얼굴을 쓸어내렸음... 예, 많이 닮았더군요. 왜 떠올리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차분하게 답하는 내내 일그러진 표정을 겨우 수습하는 데에 심력을 다해야 했음
- 개도 아니고 강아지긴 한데, 그래서 더 부끄러워할 것 같아. 하하, 이제 단장님씩이나 됐는데. 왜 내가 다 뿌듯한지.
- ……나중에, 얼굴을 보면 격려해 주세요. 분명 좋아할 테니까요.
- 에첼도 알터처럼 늠름해지겠지?
- 그렇겠지요. 아이들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커서 놀라곤 합니다.
힐드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서, 톨비쉬를 가만히 바라봄
팔자를 그린 눈썹이나 괴로울 때면 늘 그랬던... 이를 앙다문 표정... 이제는 익히 익숙한 것들... 입술만 조금 달싹거리더니 이미 알 것 같은 걸 물었음
- 걔를 격려하러 가면, 음. 내 동생이 그렇게 잘 크는 건, 못 보는 건가?
알터는 걔고 에첼은 내 동생... 그렇게 아끼던 아이에게 붙여진 호칭에서 온도차가 확 느껴져서 톨비쉬는 입 안이 썼음... 하지만 보는 듯 안 보는 듯 이따금 피하던 시선을 이번에는 똑바로 마주했음
- 내게 묻지 않아도 잘 알고 있잖습니까. 볼 수 없다는 것을요.
- ……음.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가... 제법 큰 반창고가 붙은 광대뼈 어림을 손으로 긁적거리면서... 지난 달쯤에 났던 사고를 다시 떠올려봄
천운인지 맞은편에서 오던 차가 방향을 꺾어서 어떻게, 죽지는 않았다고 들었는데...
- 그렇구나.
- …….
- 원래, 지난 달에……. 원래 못 보게 된 거였구나.
아, 나? 별거 없었는데. 안젤라가. 아, 가르치던 애가 차도로 뛰어가는 거야. 신호는 멀쩡했는데 재수가 없었는지 차가 한 대 말썽이었지. 그걸 어떻게 두고 봐. 그러다가 좀 안 좋게 됐어……. 밀레시안이라는 호칭을 떼고 이름을 말해 주면서는, 겸사겸사 톨비쉬에게도 말한 적 있었던... 짧게 말했다가 좀 안 좋게 됐어, 라는 말만은 다시 정정했던 기억. 창창하던 때에 죽은 것도 아쉽고 가족들도 더는 못 보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었으면 널 못 봤을 텐데 어떻게 그게 좀 안 좋은 일이 될 수 있는지.
하지만 돌아가지 못하는 것과 선택지가 주어진 것은 달라서... 힐드는 퍽 괴로운 얼굴이었음
톨비쉬는 제 양손만 습관처럼 꼭 맞잡다가... 힐드에게 주어진 두 번째 생을 포기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조그맣게 목소리를 틔웠음
- 안 좋은 기억을 자극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 넌 너무 물러……. 사람을 안 찌르는 것도 아니면서.
- …….
- 찔러 놓고 정작 물컹물컹하게 굴어서 화도 못 내게 하잖아.
표정을 감추려는 것처럼 마른 세수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건 비단 지금에 국한된 말이 아니라는 걸... 톨비쉬는 깨달았음
그리고 그건 말을 뱉은 힐드 역시 알고 있었고... 손마디에 하얗게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면서 톨비쉬는 입술을 달싹임
- 화, 내도 됩니다. 잘 살고 있던 당신을 찾아와선 들쑤시고 있잖습니까.
- 톨비쉬.
- ……그런 것까지 각오하고 온 겁니다.
- 하…….
쌓아둔 게 터진 것 같은 웃음을 지은 힐드가 그 날 성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기 양손을 꼭 맞잡고 있는 톨비쉬를 가만히 바라봄...
똑바르게 쳐다보던 시선도 어딜 갔는지,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린 모습을 보다가 팔을 뻗어서 꽉 맞물린 두 손을 거머쥐었음
- 매번 보고 싶다고 생떼를 쓴 게 난데 어떻게 그래. 네 얼굴 보는 게…… 나한테 얼마나 귀한 일인데…….
- …….
손이 닿자마자 놀란 톨비쉬가 어깨를 떨면서 힐드를 쳐다봤다가, 애꿎은 제 입술만 괴롭히면서 고개를 푹 수그렸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래야만 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땅에 건너온 게 몇 번인지, 톨비쉬는 알면서도 모르게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서 뭐라도 할 말을 찾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게 없었음
- 같이 있어, 당분간.
- …….
- 돌아가면, 응? 당분간은…… 날 여기서 뚝 떼어가는 거니까, 그 정도 시간은 내 줘. 그럼 그동안 네가 각오한 딱 절반만큼만 화도 내고, 원망도 할게.
- …….
-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너랑 좀 웃기도 하고 싶어.
그러니까, 톨비쉬. 돌아가자.
처음엔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당분간 여기 남아달란 말로 여겼는데... 지금 힐드가 뭘 포기하고 어떤 걸 감내하기로 한 건지 톨비쉬는...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음
힐드의 우는 얼굴을 닦아주고 싶은데 잡힌 손을 뿌리칠 수가 없어서... 먹먹하게 가라앉는 목소리를 다잡고서 되물었음
- 정말,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여기에……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있잖습니까.
- 톨비쉬.
- 돌아가면, 다시는 올 수 없을 겁니다.
힐드는 손을 꼭 쥐고 있다가... 엄지를 옮겨서 톨비쉬의 왼손 약지 위에 걸린 반지를 꾹, 눌렀다가 천천히 밀어서 돌렸음
이거... 반지를 같이 나눈 걸 기억해 달라는 듯이...
- 괜찮아. 난 너랑 같이 돌아가고 싶어.
――――――――――――
- 이제 늘 보던 데로 왔으니까, 안 멀쩡한 옷 좀 입어 봐.
- (빨개진 눈가 찡그림...)
- 큭…… 미안. 그 와중에 귀엽게 대답한 게 생각나서…….
- ……사과할 일인 걸 알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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