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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천 년 동안 봉인한 주첫검 재결합 썰

 

 

오로지 재결합을 위해 달렸기 때문에 적폐통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하셔도 보상해드릴 수 없음!!

함께 풀어준 에메 밀묵에게 감사하며...



나: 어떻게 보세요? 재결합 가능성
밀묵: 아예 0%는 아니지 않을까요... 그런데 힐드가 말을 돌렸을 때 톨비쉬도 뭔가 끝을 예감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나: (여기서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함)
밀묵: 말하진 않았지만 잠들기 전에 봐 온 모습을 아니까... 나눈 반지만 손끝으로 돌려보면 좋겠어요
나: 울어!!!!!!!!!!!! 소리 들은 것처럼 울고 있어 나







들으면서 읽어주심 감사...







길거리엔 사람도 많고 보는 눈도 많은데 옛 신들의 복장을 하고 있는 톨비쉬를 그대로 데리고 나갈 수는 없어서... 우선은 상황을 좀 정돈하고자 힐드는 제 집으로 톨비쉬를 데려갔음

자주는 아니어도 갑주를 걸친 때부터 살강거리는 금장을 두른 때까지도 종종 들렀던 발레스의 그 땅에 아직도 터를 두었는지 묻는 말에는 하하, 이제 농장은 없고 센터 근처에 있는 집이 전부야 하는 말이 대답으로 돌아옴

센터... 낯선 어감을 입 속으로 발음해 보는 톨비쉬를 보면서도 힐드는 무언가 답해주거나 허리춤에 매달려 팔랑거리던 날개가 사라진 이유 같은 것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음





―――







낡고 해진 순간이동 책을 펼쳐서 도착한 힐드의 집은 다행히도 조금 검고, 어두운 색의 가구들로 꾸며진 모양새가 전에 알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았음

이런 취향은 그대로구나. 고개를 돌려 너른 부엌이나 아일랜드 식탁에 놓인 의자 네 개를 보고 힐드의 취향인지 성격인지가 여전하다는 것에 아주 조금은... 안심한 톨비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는 손을 보고 짧게 웃었음



- 로브랑 비슷한 건데, 불편해?

- 이런 옷은 간만이라 어색하군요. 이 모습이 되고선 목을 감싸는 의복을 입을 일이 통 없었으니 말입니다.

- 그래도 잘 어울려.



모자가 뒤집힌 곳이 없도록 만져주더니 끈이 길게 빠지지 않도록 고리를 매듭지어 묶어주는 손길이 여전히 살갑고 다정했지만, 그걸로 되었다는 듯 떨어지는 모습에선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기분이었음

그도 그럴 게 힐드는 게이트에 발을 디디기도 전 즈음, 처음 농장에 톨비쉬를 데려와 제 옷을 빌려주면서나 티르 코네일에서 함께 냇물에 발을 담갔을 때에나 길게 늘어진 옷소매를 걷어 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젖은 발을 닦아줬으니까... 누군가 기꺼이 보살펴 준다는 감각 자체가 낯이 선 남자에게 매양 그어 둔 선이 없는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더구나 마음을 확인한 이래 닿았다 떨어지며 입 맞추지 않은 것은 단 한 번도 없었던 탓에 그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참 새삼스럽게, 잠들어 있는 동안 더는 자신을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게 됐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톨비쉬는 괜히 제 양손을 맞잡는 체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음



- 하하, 그런가요? 깨끗하게 입고 돌려 드리겠습니다.

- 뭐, 널린 게 옷인데. 가져도 상관없어.







―――







힐드가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간 이후에 멀린은... 이거 내가 큐피드 노릇을 자처한 건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하는 짓을 괜스레 들쑤신 건지 헷갈려 했음

아닌 게 아니라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켜봐 온 친우의 모습은 말 그대로 '멀쩡한 꼴이 아닌' 모습이었기 때문에... 밀레시안은 죽지 않는다는 불변의 명제를 가장 앞에 둔 이들이 효율적으로 굴게 되는 것은 둘째치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파괴적인 성향이라고는 농담으로라도 말할 수 없는 힐드가 울다 온 게 선한 얼굴로 모진 말을 쏟아냈을 때... 기어이 내가 죽고 나면 끝까지 함께하겠단 그 약속을 저버렸단 사실 하나로 그 애 가슴에 대못을 박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네가 방법을 좀 알아봐 달라고... 당췌 무슨 말을 하냐고, 그런 게 가능하겠느냐고 알고서도 모르는 체 어깨와 팔뚝만 거듭 토닥이고 쓸어 주던 때가 선명했으니까



대마법사 멀린이 아니라 멀린 교수님의 연구실로 직행한 둘을 보자마자 멀린은 개 큰 한숨을 푸우욱... 내쉬었음 ㅋㅋ 천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고 멀금한 얼굴을 쳐다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몇 번 꼽아보려던 멀린이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농담을 툭 내뱉었음



- 톨비쉬, 네가 그런 옷을 입기엔 나이가 너무 많지 않냐? 후드티가 다 뭐야.

- 내 옷 빌려준 건데…….

- 어우! 어쩐지 네가 입어도 태가 산다 했어.

- 큽, 하하하. 마땅한 게 없어서, 이따 사러 가야지.

- 내가 가진 게 없어서, 신세를 좀 져야 할 것 같군요.

- 신세는, 뭐. 우리 사이에.

- ……우리 사이라 부탁하기 어려운 것도 있죠. 옷도 몇 벌이나 필요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꼴을 본 게 이제 햇수로 기백은 더 되었다고 해도 지금은 어째 너무 멀쩡하지 않나. 나쁜 놈인지 큐피드인지 아직도 제 포지션을 헷갈려 하던 멀린이 연구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도 농담 같은 말이나 시시덕거리는 힐드를 계속 흘끔거리면서 곁눈질했음

둘이 말하는 우리 사이라는 게 적확하게 뭘 의미하는 건지... 알 수는 없어도 둘 중 하나는 아마 다른 뜻으로 하는 말이겠거니 생각하면서

톨비쉬가 잠든 때를 기점으로 신의 그늘에서 벗어난 에린에는 더 이상 주신의 신성력이라는 것이 기능하지 않고 종교 또한 쇠락해 신의 존재는 개념으로만 남았으니,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았는데 셋 중 누구도 그런 무거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이 없었음

조금 전에 차를 타고 오면서 멀린과 통화하던 기계를 궁금해 하는 톨비쉬에게 휴대폰을 꺼내 설명해 주던 힐드가 어딘가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느라 연구실을 나서고 나면, 힐드가 나간 자리를 돌아보던 톨비쉬가 그제서야 멀린을 쳐다봄



- 왜 그러십니까? 멀린.

- 너…… 몰라서 묻는 건 아니잖아.

- …….

- 네가 여러 사람 속썩인 건 알지? 봐, 나만 해도 심란했는데. 쟤는.

- …….

- 왜 말도 안 하고 그런 거야?

- 성급한…… 방법이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 이해해주길 바랐지요.

- 이해애……?



입술을 달싹거리는 톨비쉬를 보며 멀린은 차라리 이 말을 들은 게 자기가 먼저라 다행이라 생각했음... 너 그 말은 절대 쟤한테 하지 마, 하고 말하려던 멀린의 말은 힐드가 문을 벌컥 열고 돌아오느라 못 뱉게 되었지만 하지 않은 말을 알아들은 건지 톨비쉬는 내리깐 눈을 가만 깜빡이며 아무 말도 더 붙이지 않았음



- 가 봐야겠다. 살 것도 있고 센터에도 잠깐…… 아, 멀린. 너도 같이 갈래? 가서 좀 골라도 주고.

- 어우, 이 멀린 님은 오늘도 할일이 산더미라 안 되겠는데.

- 그래……?

- 간만에 봤는데 회포 푸는 데에 끼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아닌 게 아니라 방금도 속에 있는 이야기는 서로 일 센치도 파고들지 않고 휴대폰이니 신문물이니 하는 농담따먹기만 하는 걸 보니 따라가면 둘이 멀린만 찾을 게 훤했음... 어설프게 끼어드느니 차라리 손을 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둘이 해결을 보는 쪽을 응원하기로 결론 내린 멀린이 간만에 좀 더 보는 줄 알았는데 아쉽다는 힐드에게 나중에라도 사진 보내 주면 보겠다는 말을 하면서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음







―――







- 방은 이쪽. 안 쓰는 방인데, 가끔 멀린이 놀다 가긴 해서 치워 뒀어. 편하게 써.

-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을 법한 홈웨어가 몇 벌, 격식을 갖추어 걸칠 만한 것이 또 몇 벌. 쇼핑몰을 오래 돈 게 아닌데도 두 손을 묵직하게 채운 종이 가방은 한사코 힐드의 차지였음

연인인 제가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구는 건 여전하면서 같은 침대가 아닌 다른 방을 쓰라는 말을 내거는 괴리에 여전히 갈팡질팡하던 톨비쉬는 요즘도 사람을 초대해 함께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냐느니, 일전에 처음 당신 농장에 들렀을 때가 생각이 난다느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는 대신 침대에 새 이불을 탁탁 두드려 펼쳐 주는 힐드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만 주억거렸음

하루를 꼬박 함께 보내면서는 많은 말을 나누긴 했음... 마주 앉아 식사할 때도 그렇고 잔뜩 산 옷들을 뒷좌석에 두고 같이 카페에 가 차를 마실 때도 그렇고 내내 말을 나누는 소리가 끊기지는 않았음

왕성과 법황청이 있던 타라는 여전히 번성한 도시였지만 이제는 번화한 대륙의 중심지라기엔 옛 유적이 많아 고즈넉한 도시가 되었다는 둥 이멘 마하는 예나 지금이나 교통이 불편한 건 여전한데도 그 호수만큼은 아직도 인기가 좋아서 여름만 되면 울라 사람들은 그곳으로 휴양을 가곤 한다는 둥 오랜 시간 동안 변화한 대륙의 정세에 관한 이야기나 가볍게는 너도 휴대폰이 하나 있어야 할 텐데 어떤 게 좋겠느냐거나 하는... 그럼에도 속 안에 든 건 여전히 한 톨도 내어놓지 않는 하루였음 누구 하나 묻거나 내거나 들추어 보는 일조차 없이



- 내가 있는 것이 불편합니까?



불이 꺼진 방 안에서 탁, 탁, 하며 침구를 펼쳐 두는 힐드의 검은 인영을 보면서 톨비쉬는 다소 충동적인 말을 뱉었음

제가 내뱉은 말에 조금 놀란 톨비쉬가 습관적으로 제 양손을 붙잡은 것과는 다르게 힐드는 몇 번 더 베개가 있을 자리를 잡더니 수그렸던 허리를 펴고 톨비쉬를 바라봄

조용하고 어두운 방 안에 드는 빛이라곤 비스듬히 열린 문 너머에서 복도의 조명이 일부 스미는 것뿐이었는데, 새파란 두 눈은 어쩐지 형형해서 톨비쉬는 마른침을 삼켰음



-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깎아지른 절벽 아래 풍랑이 거센 날이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치는 파도가 꼭 저런 색이었다고, 빛 아래서 봤다면 유순하게 휘어졌을 모양을 그리는 눈동자를 보면서 톨비쉬가 느리게 대답함



- 오늘…… 당신이 통 웃질 않더군요.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돌아갈 채비를 하겠습니다.

- 돌아가면?

- …….

- 돌아가면, 또 그렇게 오래 혼자 있으려고?



오래. 혼자. 소리를 치는 것도 아닌 목소리가 잠잠했는데, 힐드가 내뱉는 단어가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손을 맞잡은 마디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뼈마디가 불거졌음

추웠다가 또 더웠다가, 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울 것처럼 울렁거리는 감각에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톨비쉬는 힐드를 마주보는 게 아니라 모호한 허공 어딘가만 바라보면서 하도 매만져 체온이 옮겨붙은 반지만 손 안으로 굴렸음



- 내가 돌보지 못한 동안 엉망이 된 땅을 정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헐거워진 봉인도 새로이 해 낯선 이가 들어서지 못하도록 해야 할 테고요.

- 톨비쉬, 있잖아.

- …….

- 그런 건 이제 사람이 알아서 해. 더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신성한 땅은 없고, 발 디딜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사람이 드나들지. 신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야.

- 그런가요. 당신이 하려는 말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 이상 그 땅에 묻힌 이들을 좌시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무거운 말과는 다르게 든 것이 없는 것처럼 말소리는 나지막했음

아발론을 당신도 꽤 좋아해주지 않았냐는, 그러니 더욱 엉망인 채로 두고 싶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걸 감으로나마 얼추 읽어가면서... 톨비쉬는 제가 발을 붙이고 서 있는 자리는 분명 힐드의 앞이 맞는데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내내 했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선을 넘어 친밀감을 표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만큼 친화력이 좋은 이라서, 나아가 저를 향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만큼 읽기 쉽던 힐드의 감정을 하나도, 정말 하나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

무언가 참는 듯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힐드가 다시 눈을 뜨고 한숨처럼 내뱉었음



- ……그렇게 해.

- …….

- 둘러보고 싶으면, 내일 같이 출발하자. 알반이 없어지면서 명목상으로는 내 소유의 부지가 되어 있어서.



한 가지... 이 사람이 퍽 지친 기색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톨비쉬가 대답 대신 조용히 덧붙임



- 내가 불편하지 않다곤 말하지 않는군요…….







―――







뜬 눈으로 밤을 지새던 톨비쉬가 시트 위에 놓였던 손을 들어 손등으로 미열이 있는 이마를 짚었음

이 세계를 이루는 한 축으로 빚어져 사명을 짊어진 대신 영원을 얻은 존재에게 먹고 마시는 것과 휴식이라는 것은 불필요했지만, 모든 힘을 쏟아내 아발론을 봉인해 묶어 두었던 그때처럼 저 자신의 존재를 붙들어 감추었던 일의 반동이란 고스란히 몸으로 겪어내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창문을 등지고 이불을 그러모아 안고서 모로 누웠음



- 던컨이 죽고, 에레원이 죽었어. 피르안도, 미르올, 바투르, 그리고 알터……. 알터가 죽은 날 널 정말 원망 많이 했거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널 보러 그 절벽에 가장 가까운 자리로 걸어가면서…… 빈손으로 걷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사과도, 꽃다발도, 선물도, 보여주고 싶은 것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없이 말이야.

- …….

- 톨비쉬,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처럼 너한테 키스하고, 널 안고, 내 품에 가둬 놓으면 실감이 날까. 네 손이라도 붙잡고, 다리에 뺨이나 좀 기대고, 그러다 네가 웃어주면 실감이 나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 …….

- 이제 모르겠어.

- …….

- ……내 곁에 있고 싶었던 건 맞아?



달칵.

대답하지 못 하는 사이 힐드가 방을 나서며 문을 닫는 소리까지... 지난 밤의 일을 되새기던 톨비쉬가 두 눈을 지르감았음

일찍이 힐드를 알게 된 순간부터 넘겨다 본 미래를 되돌려 감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기나긴 부재를 견디지 못 한 연인이 제가 더 노력할 테니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말아 달라며 애원하던 모습까지 떠올리고 말아서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을 하고서, 네가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다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그때 자기가 뭐라고 답했는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안심한 표정으로 안겨 왔는지, 선명한 기억을 한 번 되짚기 시작하니 떠오르는 것들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어서 베개에 고개를 푹 묻은 즈음이었음



- ……!



현관문을 열고 닫을 때면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도어락이 콩, 조그맣게 힘을 뺀 듯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삐리릭 우는 소리가 닫힌 방문 너머로 들려왔음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킬 듯이 움찔거리던 톨비쉬가 애꿎은 방문만 열리기를 기도하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곧 시선을 내리깔며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음... 아침에 마주칠 거라도 지금은 보고 싶지 않은가 보다고...

해가 뜨고 창문 너머에서 아침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와도 내내 힐드가 향했을 행선지만 그려보고 고민하느라 열 오른 머리를 내내 붙잡고 있던 톨비쉬가 슬며시 몸을 일으킨 건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나고 다시 힐드가 도어락을 두드린 즈음이었음

현관문이 닫히고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간 힐드가 또 조금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나와 부엌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조금 머뭇거리던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음



- 일어났어?

- ……예.

- 조금만 기다려. 다해 가.



젖은 머리를 대강 털어 말린 듯이 목덜미에 수건을 걸친 힐드가 팬에 달걀을 부치는 중이었음

화구 앞에 돌아서서 요리할 때면 슬쩍 허리를 감아 안고 붙어서던 때가 어쩐지 꿈만 같단 생각을 하면서... 식탁을 지나 다가서는 몇 걸음을 떼는 동안에도 곁에 서야 할지 허리를 껴안고 뒤에 서야 할지 고민하던 톨비쉬가 결국 근처로 다가가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식탁 근처에 서서 물었음



- 벌써 다 한 겁니까?

- 토스트가 그렇지 뭐. 계란 두 개 부칠까?

- (고개 끄덕이다가) 아, 좋습니다.

- 응, 앉아 있어.

- ……달걀은 다 익은 겁니까? 아니면 반만?

- 너 하고 싶은 대로……. 음, 뭐 좋아했었지?



되묻는 소리에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면서 톨비쉬가 식탁을 지나쳐 가까이 다가갔음... 자신의 호오를 잊을 만큼 우리가 아침을 함께하지 못한 지 오래 됐구나. 끽해야 일 년에 한두 달이 고작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곁에 서는 저를 보며 기름이 튀니 위험하단 말을 내어 놓는 힐드를 가만 바라보던 톨비쉬가 다 익은 팬의 달걀을 보고서 괜히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아직 반숙으로 먹을 수 있는 상태냐고 물었음



- 엇. 이, 이건 다 익어서…… 내가 먹을게.

- 하하, 두 개 먹을 건데요. 하나는 다 익은 거여도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톨비쉬는 가만 생각했음... 나를 원망하다 화가 나서, 들끓다 지쳐서 의도적으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이이가 과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얇게 부쳤으니까 그렇게 퍽퍽하진 않을 거야, 하며 접시에 예쁘게 담은 오픈 샌드위치를 가져다 식탁에 놓아 달라며 부탁하는 힐드를 본 톨비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음



- 다 익은 달걀을 싫어하진 않습니다. 게다가 당신 요린데 뭐든 맛있지 않겠습니까.

- 아, 하하. 요샌 별로 안 해서 녹이 많이 슬었을걸.

- 요즘은 밖에서 사 먹습니까? ……어제 보니 음식점이 많이 늘었더군요.



마실 것과 식기를 준비해 식탁에 마주 앉아서는 힐드가 가볍게 웃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접시 위로 시선을 내렸음

바쁘기도 하고 부를 사람도 이제 딱히 없으니까, 혼자 먹으려니 그냥 대강 편하게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가만 들으면서 톨비쉬는 고개를 끄덕였음

바쁘다니 새로 하는 일이 무언지도 궁금했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또 묻지 않아도 곧잘 들려줘서... 좋아하던 수영 관련된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며 힐드가 스포츠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또 짤막하게 해 주는 걸 들으면서 포크로 쿡 찔러 노른자를 터트렸음



- 배워야 할 게 많겠네요.

- 천 년이나 지났으니까. 이것저것 바뀐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 ……이렇게까지 바뀐 건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더 이상 전서구를 날리지 않아도 되고 작은 기기면 끝나는 세상, 이런 편리함은 상상하기 힘들지요.

- 편리한 것도 많은 대신에 나쁘게 변한 것도 많지. 가면서 알게 될 거야.



빵을 자르고 입으로 가져가는 속도가 천 년이란 말이 가볍게 나온 순간부터 현저히 느려졌음... 포크를 쥐었다가 엄지로 문지르더니 좀처럼 차려진 걸 입으로 가져가진 못하는 톨비쉬를 보고서 힐드가 큼, 헛기침을 하고 물었음



- 다녀와선 뭐 할래?

- (……!) 악기를, 빌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만 괜찮다면…….

- 악기? 기타는 집에도 있는데. 아, 류트가 더 낫나? 류트는 인벤토리 찾아보면 있을걸.



오래 전 방랑할 시절 힐드가 들려줬던 것도 본래는 기타를 치며 하는 노래라고 들었으니 방법만 비슷하다면야. 아발론에 다녀온 뒤의 일을 기약해주는 말에 조금은 안심한 톨비쉬가 힐드가 채보해 준 악보의 생김새나 오래도록 흥얼거렸던 선율을 가만가만 떠올리며 마저 식사했음. 간밤의 일을 마저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 나름으로는 꽤 괜찮은 시간인...







―――







- ……저렇게 많은 외부인이 수원지까지 들어온 건 내가 알반의 초대 단장으로 불릴 적 이후로 오래간만이군요.

- (오싹) 좀 짜증은 나는데 선량한 쪽도 섞여 있으니까 패면 안 돼…….

- 힐드, 내가 저들을 처단할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그 정도 유도리는 있는데요.

- 혹시 모르지.



문게이트에 사람이 나타나자마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는 톨비쉬가 혹여나 다시 그때처럼 무쌍을 찍을까 싶었던 힐드가 지레 놀라 한 팔로 어깨를 감싸다 슬며시 품에 붙였음 (ㅋㅋ) 어제의 소란으로 기자들까지 진을 치고 선 모습을 보며 짜증스러운 눈을 했다가도, 양심은 있는지 천벌을 내리겠단 말이 무서웠는지 따라 들어오지는 않는 자들을 보며 힐드는 경계지 안으로 진입한 뒤 사위가 조용해지자 톨비쉬의 어깨를 감쌌던 손을 치워냈음

미약한 신성력도 느껴지지 않는 땅을 밟으며 망루를 지나 묘지로 향하면서... 톨비쉬는 회한에 잠겨 아는 얼굴들을 가만히 떠올려 봤음

그들은 상처를 주고 또 받는 것도 감수하고 모든 연을 끊어냈는데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했다는 후회 또한...



- 천 년이 흘렀다더니 이곳도 세월을 맞았군요. ……알터와 다른 사람들도 여기 묻혔습니까?

- 알터는…… 저쪽에.



아발론에 들어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말수가 줄어든 힐드는 알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눈에 띄게 표정이 굳었음. 적어도 알터가, 그 뒤의 후임이 있던 때까지는 알반이 건재했었다는 말을 붙인 힐드가 한 비석 앞으로 다가가 섰음

들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묘지들 사이에서 제법 가까운 시일에도 사람 손이 닿은 듯한 비석 위에 익숙한 이름과 날짜가 음각되어 있었음



- 알터, 오랜만이구나.

- …….

- 이멘 마하에 들러 꽃이라도 사올 걸 그랬어.



가만히 자세를 낮추어 쪼그려앉은 톨비쉬가 손을 들어 비석을 가만가만 쓸어 매만졌음

곁에 우두커니 서서 이름자가 적힌 자리를 바라보던 힐드가 짧게 덧붙임



- 알터가 네 걱정 많이 했어. 돌아온 걸 알면 좋아할 거야.

- 그랬으면 좋겠군요.

- …….

- 마지막 순간도 지키지 못하고, 지금에야 묻힌 곳을 찾아왔으니 마냥 반기진 않으리란 생각도 듭니다.

-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그래도 알터는 눈 감는 순간까지 착한 애였어.



너한테 안부 전해 달라고 하더라. 힐드는 비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앙상해진 손으로 제 손을 더듬어 쥐던 모습을 떠올리고서 눈가를 찡그렸음

대의를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 아직 알아서는 안 될 일과 이유를 몰라도 되는 일들. 끝끝내 의문 한 번 가지지 않았던 착한 아이를 가만 되짚던 힐드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림



- 그 아이에게도, 당신에게도 못할 짓을 했군요. ……이렇게 오래, 아니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겠지요. 미안합니다.



그 애가 내어보이지 않는 원망까지 온전히 제 몫이었다면 그건, 그때의 감정은 이해가 된다지만. 톨비쉬가 자길 올려다보는 걸 시선이 닿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도 비석에만 눈을 두던 힐드가 어깨를 조금 늘어트렸음



- 괜찮아……. 이제 너 원망 안 해.

- …….

- 이야기 나누고 와. 바깥에 있을게.



순간 톨비쉬가 벌떡 일어나서 돌아서는 힐드 팔을 잡아챘음. 아발론에 들르고서 집에 돌아가면 할 일, 새로이 생긴 것들도 살피고 집 근처 지리에 대한 것도 차를 타는 대신 함께 걸어서 조금 살피고 류트나 기타도 꺼내 보겠다는 이야기를 전부 기약했는데도 덜컥 불안해져서...

힐드는 팔이 잡히자마자 헛숨을 토하고서 좀...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버렸음



- 하……. 아무 데도 안 가. 걱정 마.



노기가 서려서 떨리기까지 하는 투가 낯설어서 붙잡은 손에 힘이 빠진 순간 힐드가 마저 몸을 돌려서 팔을 빼내고 걸어가 버렸음

화가 난 사람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은 그래야만 하는 사유가 있지 않는 이상은 어느 정도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텐데...

너는 늘 멋대로 굴어 놓고 자긴 안 되냐는 듯이 씹어뱉고서 멀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곧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놓치기라도 할 세라 따라가서 이름을 불렀음



- 힐드! 윽…….



경계지에서 기사단 묘지까지 얼마 되지도 않는 걸음이었는데... 새벽부터 열이 오른 몸으로는 속도를 내 달리는 것도 힘에 겨운 나머지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휘청거리다 나무 둥치만 겨우 짚고 멈춰섬

알터 앞에서는 차마 화를 낼 수 없어서 머리라도 식히고자 경계지로 나서려던 힐드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불에 덴 듯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톨비쉬가 멈춰서서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고서는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다시 돌아서서 부축했음

오래 전에 보았던 모습과도 얼추 비슷하게 고통을 참아내는 듯한 얼굴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힐드가 팔을 붙잡는 대신 어깨를 감싸서 품에 기댈 수 있도록 해 주고서 다른 손으로는 이마를 짚었음



- 너, 어디가…… 안 좋은 거야? 다쳤어?

- 아닙니다, 그런 건…….

- 열이, 열 나는데. 언제부터 이랬어, 아까는…….



아침까진 안 그랬잖아, 하고 말하려다 그렇게 세세히 살피지도 않았단 생각이 미쳐서... 그새 파리해진 안색으로 지난 날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또 뜻모를 것을 둘러쓰고 혼자 버티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와락 화를 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가도 무언가 제가 미덥지 못해서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면 입술만 깨무는 수밖에... 아연해져서 이제는 탓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 바람에 왜 말하지 않았느냔 말만 조금 내었다가 집에 가잔 말을 재촉하듯 덧붙였음







―――







힐드는 집에 돌아가는 내내 잠시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처럼 굴었음

이 땅에 남은 주신의 흔적이고 그 존재의 증거란 더는 어떤 힘과 능력이 될 수 없고 눈앞의 어린 신만이 전부이니... 신성한 땅에 남은 힘마저 사라진 판국에 신이 사라지지 않는단 보장은 없으니까 또 그새 불안해져선... 근처에 병원이 있긴 한데 데려간다고 낫는 종류이긴 한가. 신성력이 모자라서 그런 거라면 쉬게 해주는 수밖에 없나... 안아든 톨비쉬를 내려주고서도 맘이 안 놓인단 것처럼 침대에 눕혀준 뒤에도 여전히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선 톨비쉬를 붙잡고 있다가 물수건을 짜 이마에 올려주어야 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손을 놓았음

내내 붙들려 있어서 얼얼한 손을 가만히 말아쥔 톨비쉬는, 힐드 손을 살필 겨를은 없어도 뜨거운 손 사이에서 선명한 금속 질감이 느껴졌던 걸 되새기면서 눈을 깜빡였음

고실거리는 앞머리를 젖히고 물이 흐르지 않게 꼭꼭 눌러 짠 물수건을 얹어 주고 떨어지는 손에 제 것과 똑같은 반지가 그대로 걸려 있는 모양에 시선을 가만, 두었다가 팔을 뻗어서 괜히 그 손을 찾아 쥐고서 눈을 맞췄음



- 힐드, 쉬면 나을 겁니다.

- ……이제 네 말은 못 믿겠어.



쉬면 낫는다는 말도, 지난 날의 대가일 뿐이고 다친 건 아니라는 말도... 자신에 대해 확실한 건 없고 그저 경험에 의거한 답이라는 건 서로가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둘 다 아무런 말이 없었음

곁을 비집지도 껴안고 토닥이지도 않고 제 곁에 의자를 끌어왔을 뿐인 힐드가 오래 자리에 남아있지는 않을 거라는 것도 선명하니 손가락에 걸린 반지도 어쩌면 습관일 뿐이겠다는 것도...

필요하면 부르라는 말만 두고 자릴 피해 주는 게 낫겠다고 힐드도 그런 생각은 했을 텐데 손이 붙들려 있다는 걸 핑계로 그냥 다른 손만 뻗어서 눈만 가만가만 감겨 줬음



- 눈 좀 붙여. 피곤할 텐데.

- 예…….



옆에 네가 없으니까 잠이 안 와. 그렇습니까? 한 해에 자릴 비우는 때가 더 많으니, 이거 큰일이군요. 알면 자주 와……. 농처럼 나누던 말을 떠올리곤 그때 건네받았던 농담에 장난기를 섞어 돌려줄까 생각한 톨비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차마 그러지 못한 채로 조용히 숨을 들이고 냈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힐드는 잠기운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제 손을 꼭 거머쥔 손등 위를 천천히 토닥였음

숨소리가 차츰 느긋해지고 제 손을 꼭 거머쥔 손에도 스르르 힘이 풀리고 나면 의자를 반쯤 빼 침대에 엎드리는 대신 이불만 조금 더 당겨 올려 주고서 입 한 번 맞추지 않고 자리를 떴음









―――







- 괜찮아? 나쁜 꿈 꿨어?

- …….

- 나 여기 있는데 뭐가 무섭다고……. 너 잘 필요도 없다면서 은근히 꿈은 자주 꾸더라. 응, 왜? 침대 밑에 뭐 없는지도 봐 줄까? 옷장 안에도?



누군 꿈에서 뭘 붙잡고 견딜 수도 없어서 와들와들 떨었는데 그게 마냥 웃긴 일인지, 아니면 그 에첼이란 동생을 달래 주던 습관이 남았는지. 톨비쉬가 악몽을 꾸고 퍼뜩 고개를 들 때면 힐드는 잘만 자다가도 귀신같이 팔을 뻗어와선 품 안에 가두고서 농지거릴 하곤 했음

그게 미워 냅다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입술을 꾹 뭉개버리곤 했지만... 그것도 우리 나름의 애정표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목소리에 손을 들다 말고 불현듯 이런 때가 언제 또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고 나니 허리를 감은 팔도 더운 체온도 온데간데없고 톨비쉬가 껴안은 건 희고 검은 잿빛의 옷 한 벌이 전부였음

닫은 창문 바깥에서는 눈발이 거세고, 침대 밑에도 문 닫힌 옷장 안에도 무언가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어두웠지만 고작해야 그런 것들보다는...







―――







눈물에 젖어 흐릿한 시야 너머로 석양이 이우는 색으로 물든 방 안이 보였음

고개를 돌려 보니 힐드가 끌어왔던 의자가 텅 비어 있어서 톨비쉬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무거운 이불을 휘적휘적 밀어내고 방을 나섰음

졸음에 취한 몸에 열감은 덜 가셨고 마냥 가볍지만은 못한 발을 질질 끌고 거실로 나서 보니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서 안팔짱을 끼고 잠들어 있는 힐드가 보였음

뺨 위로 죽죽 그려진 눈물 자국 위로 또 물이 뚝 흐르는 걸 아는데도 쏟아지는 걸 훔치고 닦아내서 틀어막을 기운이 나질 않았음



- …….



등밭이에 기댄 힐드가 숨을 들이고 내는 동안 천천히 몸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톨비쉬가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가 몸을 붙이고 앉았음

빠져나갈 곳도 하나 없이 눈보라 속에 갇히는 것도 이름 모를 괴물들이 오간다는 침대 밑이나 옷장 속의 어둠도 하나 무서운 것이 없었지만 처음부터 그랬단 것처럼 곁에서 힐드가 사라지는 건 견딜 수가 없어서...

곁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 거리감만큼, 딱 그 정도가 남아서... 힐드가 제대로 옆에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을 것 같음

그런 꿈을 꾸고 난 뒤이니 보는 것만으론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아서 마음 같아선 얼굴을 만져 보고 숨을 들이고 내는 것도 짚어보고 싶었지만 어디 그럴 수가 있는 처지던가

오므린 팔 위에 얹힌 손에 반지만, 그것도 비스듬히 기울어진 자리만 오래 빼지 않아 모양대로 하얗게 타지 않은 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인기척에 자던 이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음



- 톨비쉬……?

- …….

- 왜…… 아파서 깼어……?



말도 없이 곁에 가만히 붙어만 오는 체온이 아직 뜨끈해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도 안 들고 가만 기대 있는 머리를 본 힐드가 몸을 살짝 돌려서 톨비쉬를 꼭 껴안았음

비몽사몽한 와중에 애인이 곁에 있으면 아무래도 껴안는 게 당연한 수순이니까... 잠결에 감정보단 마음이 앞서서 톨비쉬가 기대어 오느라 조금 구부정한 등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주면서 간만인 온기가 좋아서 힐드는 반쯤 다시 졸고 있었음

그러다 흐윽, 하고 숨 들이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확 깨는 바람에... 톨비쉬가 고개를 안 들고 품에 얼굴만 묻고 있어서 급하게 잠긴 목 가다듬고 물음



- 톨비쉬? 왜, 왜 그래. 많이 아파?

- ……아, 아닙, 니다.



병원 갈까, 묻는 소리에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지도 않고 소리만 꾹 물고 있는 모습에 왜 그러냐고 한번 더 물으려다가... 짐작가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 우선은 떨고 있는 몸을 꼭 힘주어 안았음

등도 천천히 문질러주면서 안긴 모습만 쳐다보다가 조그맣게 숨만 내쉬고서 잠자코 달래는 듯 굴다가 몇 마디 더 붙여 봄



- 아까 알터 얘기 때문에 그래?

- …….

- 나 화 안 났어. 애 이야기가 나오니까, 내가 조금……. 미안해, 응? 톨비쉬.



오래도록 잠들어 있다 눈 뜬 순간 문득 느껴지는 탁하고 매캐한 공기... 제가 누웠던 관과 성소를 반경으로 한 얼마만큼의 거리를 제하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에린을 보면서 톨비쉬는 새삼... 힐드에게 미움 받을 각오를 다시금 다잡았음

다 괜찮으니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나는 일만은 말아 달라고. 저로서는 모자란 걸 알지만 그래도 곁에 남아줄 수는 없겠느냐고. 일주일만, 그게 안 된다면 사흘만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좋다든가...

부재가 길었으니 함께 있자는 이야기를 부탁처럼 꺼내들면서는 매양 미안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붙이던 모습...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화답했으니 이번에 다시 마주하게 되면 그 깨어진 말에 대한 힐드의 감정까지 오롯이 감내할 작정이었음

그러니까... 그러니까 결국에는 이 또한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당연하게도...



- 나는, 흑…… 무서웠, 습니다.

- …….

- 후회할 것이, 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요…….



무수한 결심을 하고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내심,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당신조차 이번에도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는 알량한 생각은 하지 않았음... 일 년에 한두 달, 그조차 힘에 부치는 것이 다 보이는데 기약 없는 헤어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으며... 고별을 말하는 순간에 쏟아질 무수한 말과 감정이... 또 사랑 같은 것이. 솔직하게는 제아무리 저라 해도 그조차 떨쳐내고 마음 편히 눈 감을 수 있으리라 여기지는 못 한 탓에...

...

하지만 톨비쉬는 또 어느 순간 한편으로는 그가 소리내어 울고 힐난하고 화를 내고... 묻고 또 물어서 제게 대답을 얻어내고야 말 거라 생각했음

내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이건 정말로 여기까지라는 선 너머까지 침범하고 또 파고들어 가슴 속에 놓인 것을 차지하는 것이 매사 힐드의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행동의 이유를 소리쳐 묻지도 화를 내며 따지지도 않고 그저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 너는 이제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니라는 것처럼만 굴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 혼자 둬서…… 미안합니다.

- ……톨비쉬.

-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당신 곁에…… 맹세코…….



톨비쉬가 무서웠다고 말하는 순간에... 그러안은 힐드의 팔에 꾹 힘이 들어갔음

숨죽여 우느라 떠는 몸을 붙들어 쥐고, 남은 손으로는 등을 쓸어주면서...

한참을 껴안고만 있다 흐느끼는 소리가 좀 가시고서야 천천히 몸을 떼어낸 힐드가 저 역시 붉어진 눈으로 가만히 시선을 맞췄음



- 그때, 성소에서. 수원지에서…… 앞으로 안 그러겠다고 했잖아.

- ……예.

- 혼자 남겨두지 않겠다고도, 네가 몇 번 말했잖아. 그치.

- 예…….

- ……이제 네가 안 그러겠다고 말만 하는 걸로는 못 믿어. 듣기만 하는 걸로는 괜찮지가 않아서.

- …….

- 다음에는…… 그렇다고 말해 줘. 무섭다고, 이런 일이 있으니까, 저런 방식을 써야 할 것 같다고.



해묵은 상처가 흉이 되지 못하고 또 진물이 새는... 그 위로 다시 약속이라는 걸 걸어 쥐기로 한 사람이 그제서야 아주 오래 전부터 말랐던 것을 툭툭 떨구면서 속삭여 물었음

그러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말로 하여금 더이상 너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내걸고 있으면서... 또 이미 다 깨어져 무너진 것을 한번 더 받아들어 손안에 쥔 톨비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음



- 그러니까 기다려줄 수 있겠느냐고, 나한테 물어봐 줘.

- …….

-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힐드는 톨비쉬에게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을... 한 번 이상 하지 않았음

매사 톨비쉬가 거절하는 것도 있고... 바쁜 사람에게 이 말이 얼마나 부담일지 알고 있었고 또 어느 순간부터는 어차피 실현이 되지 않을 일인데 말해서 괜스레 마음만 무겁게 두는 것이 기다리는 입장에서 할 노릇은 아니라고 생각한 탓이겠지...

하지만 이번만은... 그런 말을 한 번만 해주는 게 무어 그리 어렵냐는 투정을 부리고 싶어서...



해가 저무는 빛이 그대로 담겨서 어둑하게 멍이 든 것 같은 색으로 물든 눈이 계속... 계속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음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고 있다고, 앞으로는 그렇게 하겠다고, 거듭 답하는 목소리를 가만히 들으면서 흐느끼던 힐드가 조용히 답했음



- ……입 맞춰 줘, 톨비쉬.

- …….

- 네가 나한테 돌아온 게 실감이 안 나니까, 얼른…….



















- 보고 싶었어…….

- 나도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돌아갈 곳은 한참 전부터 당신 곁이라 생각했어요……



뒤에 좀 더 있는데 이건 그냥 보상미션 격이라 안 붙였습니다

대체로 이런 스타일의...







추가)



Q. 힐드 그래서 새벽에 왜 나갔나요

A. 어? 조깅 나갔지

Q. 보기 싫어서 나간 게 아니라요?

A. 어차피 아침 같이 먹을 건데 나가는 게 의미가 있어?

Q. 화 안 났나요? 문도 살살 닫던데

A. 화 났다고 잘 자는 사람 잠을 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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